景福34 제80차 文化遺産踏査(6-2); 大高麗 918-2018, 그 찬란한 挑戰 (5-2)
(46) 最上의 아름다움, 王室美術
(47) 物産의 集散地, 開京
泰安 대섬에서 건져 올린 陶磁器
忠南 泰安 대섬 隣近海域에서 2萬餘點이 넘는 도자기와 木簡, 생활용품 등이 引揚되었다.
이곳은 潮水干滿의 差가 크고 暗礁가 많으며, 다른 海域보다 안개가 자주 껴 海難事故發生
可能性이 높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발, 접시, 완. 잔 등 日常用器뿐만 아니라 두꺼비모양 벼루,
사자모양 향로 등 특수용도의 그릇도 있었다. 磁氣에는 앵무, 蓮瓣. 물고기, 파도 등의 각종
文樣이 다양한 技法으로 장식되었다. 특이 운송물품의 發信者와 受信者를 적은 木簡이 발견되어
水路를 활용했던 고려시대 漕運制度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判讀結果 出港地는
耽津(현재 全南 康津郡), 受取人은 開京의 崔大卿(혹은 崔氏 姓의 큰 벼슬한 사람)임이 밝혀 졌다.
(*簡: 대쪽 간 *礁: 암초 초 *瓣: 외씨/꽃잎 판 *漕: 배로 실어 나를 조 *耽: 즐길 탐)
(48) 1∙2 청자파도무늬 완[靑磁陰刻 波濤文 碗]- 3 청자 연꽃무늬 대접[靑磁 陰刻 蓮瓣文 大楪 -
4∙5 청자 앵무무늬 대접[靑磁陰刻 鸚鵡文 大楪]
(*碗: 사발 완 *楪: 마루 접 *鸚: 앵무새 앵 *鵡: 앵무새 무)
(49) 청자 구름학무늬 매병[靑磁象嵌 雲鶴文 梅甁](왼쪽) – 청자 국화 모란 버드나무 가래
대나무무늬 매병[靑磁象嵌 菊花 牡丹 柳藘 竹 梅甁]-목간(복제 품) -보물 1783호
=청자 구름학무늬 매병[靑磁象嵌 雲鶴文 梅甁] -고려
고려청자 梅甁 중에 이 작품과 같이 뚜껑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뚜껑 윗면에 구멍 2개가 달린 것으로 보아 매병 위에 비단이나 刺繡보자기를 어깨까지
씌우고 그 위에 뚜껑을 닫았던 것으로 보인다. 매병 뚜껑과 몸체에도 구름과 鶴을
象嵌했는데 이런 무늬는 高麗王室과 中央官僚를 爲主로 유행했던 道敎와 관련된 圖像으로
여겨진다. 王室用 도자기를 제조했던 全南 康津이나 全北 扶安 柳川里 가마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자 국화 모란 버드나무 가래 대나무무늬 매병[靑磁象嵌 菊花 牡丹 柳藘 竹 梅甁]과
목간[木簡](복제품) -보물 1783호
靑磁 象嵌菊花牡丹柳蘆竹文 梅甁 및 竹札(보물 1783)은 충남 泰安郡 近興面 馬島에서
마도2호선이라 명명된 고려시대 선박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제작 시기는
12세기 후반~13세기 초반 경으로 추정된다.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은 瓜形처럼
몸체를 6개의 면으로 陰刻하여 분할하였다. (*蘆: 갈대 로 *瓜: 오이 과)
竹札에는 ‘樽’이라는 器皿의 명칭과 내용물이 기재되어 있어 고려시대 매병의 표기와
참기름을 담았던 매병의 당시 용도를 알 수 있게 하는 時代性과 稀少性을 지니고 있으며,
죽찰을 매병에 매달기 위해 홈을 팠다. 앞∙뒷면에 글자가 있으며, 앞면은 8자, 뒷면은 6자
총 14자이다. 앞면에 적은 ‘重房都將校吳文富’는 受取人을 적은 것이며, 뒷면의
‘宅上眞盛樽封”는 樽에 참기름을 담아 올린다는 내용이다. (*樽: 술통 준 *皿: 그릇 명)
(50) [金城官記匠]이라고 쓴 거울(왼쪽부터)-[蘇州]라고 쓴 거울-契丹文字를 쓴 거울
-청동 寶珠무늬 거울
=[金城官記匠]이라고 쓴 거울 -金나라 –청동 -開城 부근 출토
=[蘇州]라고 쓴 거울 -金나라 –청동 -開城 부근 출토
=거란문자를 쓴 거울[契丹 小字銘 銅鏡] -遼 나라 -靑銅
=청동 寶珠무늬 거울[銅製寶珠文圓形鏡] -遼 -靑銅 -開城 부근 출토
(51) 泰安 馬島 海域에서 引揚한 中國磁器. 5∙6 백자 대접[白磁 大楪]-7∙8 흑유 완[黑釉 碗]
충남 泰安 近興面 馬島海域에서 중국 陶磁器 등 100여점이 引揚되었는데 中國 福建省에서
제작된 宋∙元代 도자기와 北宋時代 銅錢인 元豊通寶 등이다. 특히 宋∙元代 陶磁器 밑면에는
麗宋貿易에 참가했던 商團의 표시인 ‘○綱’이 墨書로 남아 있었다. ‘綱’’은 상업적 거래를
하는 회사 또는 團體語이다. 이 묵서 도자기는 中世 韓·中 교류관계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 宋나라 사신 徐兢이 1123년 고려 開京을 다녀온 뒤 쓴 <高麗圖經>에
묘사한 물길은 泰安 馬島 앞바다로 확인되고, 특히 물길이 험하여 難行梁이라고 일컬었으며
使臣이 머무는 客館 安興亭이 馬島에 있다고 밝혔다. 당시에는 '難破船의 共同墓地'로
惡名 높았던 이곳이 지금 '바닷 속 慶州'로 불리는 건 아이러니이다.
(52) 開京 속의 다른 나라
(53) 백자 병[白磁 甁](왼쪽)–청백자 봉수 병[靑白磁 鳳首 甁] -中國 宋
=청백자 봉수 병[靑白磁 鳳首 甁] -宋 12세기 -傳 文公裕 墓 出土
文公裕 무덤에서 나온 다양한 도자기(2, 6, 7, 8, 9)
高麗 中期의 文臣 文公裕(1088~1159)는 從一品 判三司事까지 오른 高位官僚로 1115년
宋나라, 1129년과 1150년에는 金나라에 使臣으로 파견되었었다.
文公裕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도자기 중 2점은 高麗靑磁이며 3점은 中國白磁이다.
중국백자 3점 중 ‘청백자봉수병’과 ‘백자모란∙넝쿨무늬주자’는 景德鎭窯에서,
‘백자국화∙넝쿨무늬잔’은 定窯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도 景德鎭 靑∙白磁는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地位에 있는 상류층의 무덤에 副葬되었는데 高麗도 동아시아 문화를
共有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54) 多樣한 陶磁器
(아래 왼쪽부터) 청자 팔각모양 항아리[靑磁蓋壺]-백자 잔과 뚜껑[白磁 有蓋盞]
-청백자 참외모양 병[靑白磁 瓜形甁]-청백자 주자와 승반[靑白磁 注子, 承盤]
-傳 文公裕 墓 出土
(위 왼쪽부터) 청백자 꽃 넝쿨무늬 주자[靑白磁印畵纏枝花文 注子]
-청백자 꽃무늬 합[靑白磁 印花折枝花卉文 盒]-백자 꽃 모양 접시[白磁花形楪匙]
-청자 국화무늬 접시[靑磁象嵌菊花文楪匙]
-청백자 모란∙넝쿨무늬주자[靑白磁陽刻 牡丹唐草文 注子]
-청자 국화∙넝쿨무늬대접[靑磁象嵌 菊花 唐草文大楪]
-백자 국화 넝쿨무늬 잔[白磁陰刻 菊花文盌]
6, 7 -宋 12세기 -傳 文公裕 墓 出土
8, 9 -高麗 12세기 -傳 文公裕 墓 出土
(*纏: 얽을 전 *卉: 풀 훼 *盌: 주방 완)
(55) 백자 보상화 넝쿨무늬 꽃모양 대접[白磁 印花纏枝花文 大楪]
– 백자 모란꽃모양 대접[白磁陽刻 牡丹文六花形 大楪] (*纏: 얽을 전 *楪: 마루 접)
=백자 보상화 넝쿨무늬 꽃모양 대접[白磁 印花纏枝花文 大楪] -宋 -開城 부근 출토
=백자 모란꽃모양 대접[白磁陽刻 牡丹文六花形 大楪] -宋 -開城 부근 출토
(56) 多樣한 陶磁器
開城 鵠嶺里에서 나온 中國磁器 (3,4,5,6) (*鵠: 고니 곡)
開城市 인근 鵠嶺里에서 나왔다고 傳하며, 곡령리는 지금의 해선리로 이 지역은 高麗王陵이
多數 造成되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그릇이 모두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덤이나 구덩이에 묻혀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茶를 마실 때 사용하는 碗 2점과 盒, 베개,
油餠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시대 사람들이 다양한 中國磁氣를 사용한 예를 알 수 있다.
(아래 왼쪽부터) 청자 인물무늬 주자[靑磁 劃花人物文 注子]-청자칠보무늬 대접
[靑磁陽刻 七寶文 大楪]-청자 보상화무늬 꽃 모양 대접[靑磁陽刻 寶相華文 花形盤]
-‘대’를 새긴 백자 타호[白磁 ‘大’字銘 唾壺] -宋 나라 -開城 부근 출토
(*唾: 침 타 *壺: 병 호)
(위 왼쪽부터) 3. 청백자 사자장식 베개[靑白磁 獅子枕]- 4. 흑유 완[黑釉 白綠碗]
- 5. 백자 합[白磁 盒]- 6. 백자 보상화무늬 대접[白磁陰刻花文 大楪] -宋 나라
(57) 中國 磁器; 백지 흑화 모란넝쿨무늬 병[白地黑花 甁](왼쪽)
-백유 모란무늬 병[白釉搔落 牡丹文甁] (*搔: 긁을 소)
=中國 磁器; 백지 흑화 모란넝쿨무늬 병[白地黑花 甁] -宋
=백유 모란무늬 병[白釉黑搔落 牡丹文甁] -宋 -고려무덤 출토
(58) 녹유 모란덩쿨무늬 표주박모양 병[綠釉刻花纏枝 牡丹文葫蘆甁] (*纏: 얽을 전)
-흑유주자[天目釉 蓋付 修注]-흑유 완[黑釉 盌]-장유 완[醬釉 碗](왼쪽부터)
=녹유 모란덩쿨무늬 표주박모양 병[綠釉刻花纏枝 牡丹文葫蘆甁] -宋
=흑유주자[天目釉蓋付 修注] -宋 (*釉: 광택 유)
=흑유 완[黑釉 盌] -宋 -開城 부근 출토 (*盌: 주발 완)
=장유 완[醬釉 碗] -宋 -高麗무덤 출토
(59) 開城부근 출토 裝身具
(60) UNESCO世界遺産 慶南 陜川 伽倻山 海印寺 藏經板殿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陜川 海印寺 藏經板殿] -국보 제52호 -조선시대
경남 陜川郡 伽倻山 중턱에 자리잡은 海印寺는 統一新羅 哀莊王 3년(802)에 建立한 寺刹로,
王后의 病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三大寺刹 중 하나이며, 八萬大藏經을 보관하고 있어 法寶宗刹이라고도 부른다.
藏經板殿은 고려시대에 만든 8만여장의 大藏經板을 보관하는 건물로, 海印寺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建立 年代는 알지 못하나, 조선 世祖 3년(1457)에 再建하고
成宗 19년(1488)에 學祖大師가 王室의 後援으로 다시 지었으며.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壬辰倭亂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光海君 14년(1622)과
仁祖 2년(1624)에 補修했다. 남∙북쪽의 두 건물은 각각 앞면 15칸∙옆면 2칸으로,
남쪽 건물은 ‘修多羅藏’, 북쪽 건물은 ‘法寶殿’이라고 하며 동∙서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의
작은 書庫가 있어 전체적으로 긴 네모 형으로 배치되었다.
大藏經板을 보관하기 위하여 通風을 위해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으며,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어
濕度를 조절하도록 했다. 海印寺藏經板殿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大藏經板 保管用 건물이며, 大藏經板과 高麗刻板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으로 등재되었다.
(61) 1100년의 智慧
(62) 나전 국화 넝쿨무늬 경함[螺鈿 菊唐草文 經函] -고려 13세기 -螺鈿
-英國 英國博物館(大英博物館) 所藏
전 세계에 9점 남아 있는 螺鈿 經函 중의 한 점을 영국박물관으로부터 貸與했다.
'나전 국화 넝쿨무늬 경함'은 大藏經을 보관하는 함으로 얇게 깎은 조개를 이용해 최고의
기술로 만들었다. 국화넝쿨무늬를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질서정연한 느낌을 주면서도
한 단씩 꽃의 위치를 어긋나게 하는 등 변화를 주었다. (*螺: 소라 나 *鈿: 비년 전)
法寶宗刹 海印寺 高麗大藏經板
高麗는 中國의 大藏經을 가져오는데 만족하지 않고 獨自的인 고려의 大藏經을 만들었다.
짧은 시간에 木板을 만들고 새길 수 있는 蓄積된 技術뿐만 아니라 인쇄에 필요한 종이와 먹을
생산하는 기술, 수많은 經典을 모아 비교하고 檢證하는 知的 力量까지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海印寺에는 八萬大藏經과 함께 고려시대에 만든 다양한 經板이 보관되어 있다.
經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變相圖 木板은 경전에 관한 지식의 精髓를 예술로 昇華시켰음을
보여주며, 1098년에 만들어 가장 오래된 華嚴經 木板은 高麗의 길고 긴 大藏經의 歷史를 알려준다.
(63) 法寶宗刹 海印寺 高麗大藏經板. 지옥의 모습을 새긴 목판[佛說 預修十王七經 變相圖]
-보물 제734-4호 -木板 -陜川 伽倻山 海印寺 所藏
<十王經>이라고도 하는 이 經典에는 人間이 죽어서 만나게 되는 地獄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지옥에 있는 열 명의 十王은 살아서 지은 罪業과 福德을 판결한다.
이 목판에는 각 지옥에서 만나게 될 王과 判官, 獄卒, 심판 받을 靈魂의 모습을 새겼다.
第五 閻羅王은 동그란 業鏡臺에 비친 살아 生前에 지은 죄로 判決한다. (*閻: 마을 염)
(64) 가장 오래된 [화엄경] 목판[大方廣佛 華嚴經 壽昌年間板] -고려 1098년 -木板
–법보종찰 海印寺 소장
<大方廣佛 華嚴經> 권45의 일부로 마지막 부분에 壽昌 4년(1098) 3월에 板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승려 成軒의 主導로 海印寺에서 華嚴經板이 刊行되었다고 한다.
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木板으로, 無數히 많은 知識이 담긴 高麗大藏經의 광대한 역사를
대표한다. (*軒: 집 헌)
(65) [화엄경]의 장엄한 세계를 새긴 목판[大方廣佛 華嚴經 周本變相圖] -국보 206-14호
-고려 -목판 -海印寺 소장
華嚴宗의 근본이 되는 經典 <華嚴經>의 내용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 <華嚴經 變相圖>이다.
이 木板은 唐나라 때 번역한 80권 <華嚴經>의 내용을 要約해서 새긴 것이다.
菩提樹 아래에서 毘盧遮那佛이 文殊菩薩과 普賢菩薩에게 깨달음에 대하여 설명하는 장면이
담겨있으며, 多樣한 모습의 聽衆이 說法을 듣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
(66) 목판에 다시 새긴 ‘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 佛祖 直指心體要節] -보물1132호
-고려 1378년 –종이에 인쇄(목판) –京畿 城南市 한국학중앙연구회 장서각 소장
*<백운화상초록 불조 직지심체요절>은 ‘佛祖 直指心體要節’ 또는 ‘佛祖 直指心體’라고도
부르며, 歷代 여러 부처와 고승들의 法語, 對話, 편지 등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편찬한 것이다. 中心 主題인 直指心體는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心性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白雲和尙이 고려 恭愍王 21년(1372) 元나라에서 받아온 <佛祖直指心體要節>
1권의 내용을 대폭 늘려 上∙下 2권으로 엮은 것으로 크기는 가로 15.8㎝, 세로 21.4㎝이다.
고려 禑王 4년(1378) 6월 白雲和尙이 入寂한 驪州 鷲巖寺에서 弟子 法隣 등이
禑王 3년(1377) 淸州 興德寺에서 간행한 금속활자본을 바탕으로 간행한 것이다.
金屬活字는 다양한 책을 간행하고 矯正을 보기에는 편리하나 한번에 여러 本을 찍기는
어려워 木板으로 다시 찍기도 했다. 木板本 <佛祖直指心體要節>은 고려시대에
金屬活字 印刷와 木板印刷가 서로 補完關係가 있음을 알려준다. (*鷲: 독수리 취 *禑: 복 우)
*白雲和尙 景閑(1299~1374)
全羅道 古阜(현 全北 井邑市) 출신으로 고려 후기의 僧侶∙禪師로, 求法을 위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10여년 동안 指空에게 法을, 石屋에게서 臨濟宗의 禪法을 전해 받은 뒤 귀국했다.
1365년 懶翁의 천거로 神光寺 住持, 1368년 京畿에 있는 王妃 魯國公主의 願堂인 興聖寺의
주지가 되었다. 1369년 金浦 포망산 孤山庵에 隱居했다 驪州 慧目山 鷲巖寺에서 後學들을
지도하다가 “이르는 곳이 모두 돌아갈 길이요, 만나는 곳이 모두 고향”이라는 臨終偈를
남기고 入寂하였다.
白雲和尙은 禪과 敎는 이름만 다를 뿐 평등한 한 몸이라는 禪敎一體를 주장했으며, 著書는
法門集 <白雲和尙語錄)>과 프랑스 파리에서 발견된 세계 最古의 금속활자본
<佛祖直指心體要節>이 있다. (*阜: 언덕 부 *懶: 게으를 나 *慧: 슬기로울 혜 *偈: 쉴 게
*寂: 고요할 적)
(67) 해인사 대장경판에서 인쇄한 조선시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4호
–조선 1865년 -종이에 인쇄(목판) -月精寺 성보박물관 소장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4호 –월정사 성보박물관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8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五臺山 月精寺에 있는 八萬大藏經은 朝鮮 高宗 2년(1865)
海印寺의 高麗大藏經 經板에서 직접 찍어온 것으로 가로 84.6㎝, 세로 24㎝이며 韓紙에
인쇄하였다. 板의 끝에는 經典의 이름과 卷數의 刊行 차례를 千字文 순서대로 새겨 놓았는데
총 1,511부 6,802권 81,137판이다.
(68) 나전 묘금 물가풍경무늬 향 상자[螺鈿金泥 蒲柳水禽文 香箱](왼쪽)
-나전 향 상자의 제작과정 재현도[螺鈿 香箱子의 製作過程 再現圖] (*蒲: 부들 포)
(69) 誓願, 모든 것의 시작
(70) 법화경 변상도[妙法蓮華經 卷二 變相圖] -고려 1340년경 -紺紙에 金泥와 銀泥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푸른색의 쪽빛물감으로 물들인 종이 紺紙에 金泥로 그림을 그리고 銀泥로 글씨를 쓴
<法華經>이다. 화면 오른쪽에는 부처가 說法하는 장면이, 왼쪽에는 經典 내용 중
‘불에 타는 집의 비유’, ‘가난한 아이들의 비유’를 묘사했다. ‘불에 타는 집의 비유’는
아버지가 아이들을 불에 타는 집에서 나오게 하려고 膳物을 약속했다는 비유이다.
‘가난한 아이들의 비유’는 어릴 때 집을 나가 고생하며 자란 아들이 富者 아버지를
다시 만났으나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하자, 아버지가 그를 일꾼으로 데려와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점점 중요한 일을 맡기며 결국 後繼者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紺: 감색 감 *泥: 진흙 니)
*變相圖: 불교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을 視覺的으로 形象化한 그림.
*紺紙: 검은빛이 도는 짙은 남색으로 물들인 종이.
(71) 국왕이 發願한 ‘불공견삭 신변진언경’[紺紙銀泥不空羂索紳變眞言經 卷十三] -국보 210호
-고려 1275년 -紺紙에 金泥와 銀泥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고려 忠烈王 1년(1275) 왕의 發願으로 三重大師 安諦가 글씨를 쓴 <紺紙銀泥寫經>으로
不空羂索觀音菩薩의 秘密修行法門을 설명하여 보여준 책이다. 金線으로 윤곽을 그리고,
神將을 그린 變相圖와 한 줄에 14자의 글자를 은가루를 이용하여 쓴 經文으로 이루어졌다.
책 앞의 제목 끝에는 千字文의 ‘慕’자가 표시되어 있어 千字函(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책의 번호를 매기는 방법)을 사용했으며, 더불어 이 책이 大藏經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검푸른 색 종이에 은가루를 사용하여 직접 佛經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으로,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보관할 수 있게 했다. 전체 30권 중 권13에 해당하는 것으로 日本으로 유
출되었던 것을 되찾아온 것이다.
고려시대 王이 發願한 經典이 여러 種이 傳來되고 있으나 이 책이 가장 먼저 만든 것이며,
神將像과 기록까지 갖추고 있어 높게 평가되며, 정교한 그림과 정성 어린 글씨는 품위를
한층 더 높여주는 가장 뛰어난 문화재이다.
(*紺: 감색 감 *羂: 올무 견 *紳: 큰 띠 신 *索: 노 삭)
(72) 깨달음의 수행방법을 담은 ‘원각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보물 753호
-고려 1357년 -紺紙에 金泥 -湖林博物館(서울 冠岳區 新林洞) 소장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은 줄여서 ‘圓覺經’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승려들의
敎科科目으로 채택되어 佛敎 修行의 길잡이 구실을 하는 경전이다.
상수리열매로 물들인 종이에 金泥로 <대방광원각수다나료의경>의 說法圖를 그리고
經文과 指空禪師의 <文殊最上乘無生戒法> 經文을 적었으며, 뒷면에는 慧能의
<法寶壇經> 經文을 적어 세 經典을 하나로 엮었다. 恭愍王 6년(1357) 戒桁을 위해
崔迪과 一莊이 金淸, 戒心과 함께 發願하였다. 平民이 발원한 귀중한 자료이다.
(*了: 마칠 료 *壇: 단 단 *桁: 도리 형 *迪: 나아갈 적)
(73) 다양한 신중을 그린 화엄경 변상도[大方廣佛 華嚴經 神衆合部] -고려 1350년 -감지에 금니
忠定王 2년(1350) 延安郡夫人 李氏가 他界한 父母와 夫君 金碩의 冥福을 빌며 發願한
사경이다. 表紙에 쓴 제목은 ‘大方廣佛 華嚴經 神衆合部’로 紺紙의 앞 뒷면에 모두 經典을
筆寫했다. 앞면은 고려시대에 가장 인기를 누렸던 普賢菩薩의 誓願 <普賢行願品>이고,
뒷면은 華嚴經의 첫 번째 品인 <世主妙嚴品>이다. 毘盧遮那佛의 說法風景을 그린 變相圖를
지나면 金剛神, 神衆神 등 38位 神衆의 행렬과 이들의 誓願을 담은 偈頌이 있다. 모든 如來가
형상이 나타난 곳에 따라 가며, 居하시는 곳을 항상 수호하겠다는 큰 誓願을 세운 아들이다.
(*碩: 클 석 *偈: 쉴 게)
*偈頌: 부처의 공덕(功德)을 찬미(讚美)하는 노래.
高麗의 첫 번째 대장경 <初雕大藏經>
(74) 初雕大藏經板으로 찍은 유가파의 기본경전, [初雕本 瑜伽師地論 卷 十五] -국보 273호
-고려 11세기 -종이에 인쇄(목판) -1983년 송성문 기증
佛敎에서 三藏은 부처의 說法을 담은 經藏, 生活規範을 담은 律藏, 經과 律에 대한 高僧들의
解說을 담은 論藏을 이르며, 이를 망라한 것이 大藏經이다. 高麗는 佛敎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宋에서 만든 <開寶版 大藏經(開寶藏)>을 원본으로
顯宗 2년(1011)부터 자체적으로 大藏經을 木板에 새겨 간행하였다. 開寶藏의 誤謬를
수정하고 이후에 나온 經典을 수집하여 포함시킨 初雕大藏經은 高麗의 思想과 學問 力量이
結集된 知識文化의 結晶體이다. (*雕: 새길 조 *瑜: 아름다운 옥 유 *謬: 그르칠 류)
(75) 瑜伽師地論의 핵심을 정리한 경전[初雕本 顯揚聖敎論 卷十二](왼쪽)
-초조대장경에만 수록된 경전[初雕本 新纘一切經源品次錄 卷二十]
*[初雕本 顯揚聖敎論 卷十二] -국보 271호 -고려 11세기 -종이에 인쇄
印度의 無着菩薩이 지은 글을 唐나라 玄奘이 번역하여 千字文의 순서대로
20권을 수록한 책으로, 高麗大藏經 가운데 처음 만든 本의 하나이다.
이 板本은 간행할 당시의 表紙, 卷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데 종이의 質과
인쇄상태 등으로 보아 11세기에 간행된 初雕大藏經으로 추정된다.
초조대장경의 원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瑜: 아름다운 곡 유 *顯: 나타날 현 *揚: 날릴 양 *奘: 클 장)
=[初雕本 新纘一切經源品次錄 卷二十] -국보 245호 -고려 11세기 -종이에 인쇄
*<一切經源品次錄>은 唐나라 從梵이 <貞元釋敎錄>에 의거하여 여러 經卷을
대조하여 정리하고, 經名, 번역한 사람, 總 紙面數와 卷帙 그리고 각 經의 차례를
卷別로 시작하는 本文에 이어 종이의 수, 行數를 차례대로 적어 30권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이 유물은 그 가운데 권20에 해당하며, 初雕本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纘: 이을 찬 *釋: 풀 석 *帙: 책권 차례 질)
(76) 초조본으로 찍은 화엄경 [初雕本 大方廣佛 華嚴經周本 卷 四十八] -고려 12세기
-종이에 목판인쇄 -호림박물관 소장
(77) 약사신앙의 근본이 되는 경전[初雕本 藥師瑠璃光如來 本願功德經] -보물 1780호
-고려 11~12세기 -종이에 목판인쇄 -법보종찰 海印寺 소장
(*瑠: 맑은 유리 유 *璃: 유리 리)
*大寂光殿 木造毘盧遮那佛坐像 腹臟物 -보물 1780호
統一新羅 末~高麗 初에 조성되어 高麗 毅宗 21년(1167)과 14세기, 朝鮮
成宗 21년(1490)에 重修된 ‘陜川 海印寺 大寂光殿 木造毘盧遮那佛坐像(보물 제1779호)’에서
수습한 腹藏典籍 중 일부(8건 37점)이다.
寺刹로 가는 길
(78) 寺刹로 가는 길
(79)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 -국보 73호 -고려 11~12세기(추정) -靑銅, 金鍍金
-서울 城北區 澗松美術館
높이 18㎝의 작은 佛龕으로, 靑銅으로 불감과 불상을 만들고 그 위에 금칠했다.
불감 내부는 난간을 두른 사각형의 基壇 위에 本尊佛과 양 옆에 菩薩像이 있으며, 그 위에
기둥과 지붕으로 된 뚜껑이 덮여 있다. 法堂 모양의 뚜껑에는 앞면과 양쪽에 커다란 창
문이 있어 안에 모신 佛像을 잘 볼 수 있게 했다. 中國 北方系統의 영향을 받은
11∼12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 또는 그 이전의 木造建築 樣式과 彫刻手法을
보여주는 귀중한 例로 가치가 크다. (*龕: 감실 감 *菩: 보살 보 *薩: 보살 살)
*佛龕: 佛像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것.
(80)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長谷寺 金銅藥師佛坐像] -보물 337호
-고려 1346년 -金銅 -靑陽 長谷寺
충남 靑陽의 長谷寺 下大雄殿에 모신 佛像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肉髻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은
단정하고 優雅하나 統一新羅時代 佛像에서 보이던 微笑는 사라지고 謹嚴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1959년 佛像 腹臟에서 發願文이 발견되어 승려
白雲의 發願으로 千 餘名이 施主하여 고려 忠穆王 2년(1346)에 만든 것을
확인하였다. (*髻: 상투 계 *腹: 배 복 *臟: 오장 장)
(81) 철조 비로자나불좌상[鐵造 毘盧遮那佛坐像] -고려시대 -鐵
佛敎의 眞理인 ‘法’을 인격화하여 形象化한 毘盧遮那佛像으로,
양손은 가슴부분에 올려 왼손은 주먹을 쥔 채 둘째 손가락을 세워
오른손을 감싸 쥔 智拳印을 하고 있다. 鐵佛은 통일신라 말부터 제작하여
고려시대에 유행했으며 이 불상에서도 鑄造過程에서 佛像 표면에
가로∙세로의 外形 틀 分割線이 남아있다. (*遮가릴 차/자)
(82)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 -고려 14세기 -건칠과 나무에 채색
乾漆佛은 삼베나 모시에 옻칠한 후 여러 번 겹친 것을 건조시켜 완성한
佛像으로 韓∙中 옛 文獻에는 夾紵像 또는 漆像이라고 했다.
宋과의 交流로 중국의 乾漆佛 제작 전통이 傳來되면서 高麗에서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乾漆 技法으로 제작된 菩薩坐像 중에서 가장 크며, 광물을
새겨 넣은 장식판으로 화려하게 꾸민 金銅寶冠이 함께 남아 있다.
(*漆: 옻 칠 *夾: 낄 협 *紵: 모시 저)
(83) 금동아미타불좌상[金銅阿彌陀佛坐像] -고려 14세기 -金銅
阿彌陀佛은 西方 極樂淨土에 머물면서 說法하는 부처로, 限없는 光明과
壽命을 상징한다. 이 아미타불상은 얼굴이 계란형으로 갸름하면서도
부피감이 있으며, 耳目口鼻는 단정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머리의 중간 髻珠, 속옷인 僧却崎의 띠매듭과 왼쪽 가슴아래로 드리워진
마름모꼴 장식. 왼쪽 팔뚝 위에 겹쳐진 옷주름 표현 등은 高麗後期佛像의
특징이다. (*鼻: 코 비 *髻: 상투 계 *崎: 험할 기)
(84) 대승사 금동아미타불좌상[大乘寺 金銅阿彌陀佛坐像]
-보물 1634호 -고려 14세기 -金銅 -聞慶 大乘寺
阿彌陀佛은 衆生을 고통에서 벗어나 極樂世界에 태어나게 해주는
부처이다. 聞慶 大乘寺 極樂寶殿에 봉안된 阿彌陀佛像은 高麗後期에
조성된 불상이다. 양손은 엄지와 약지를 구부린 手印을 취하고 손바닥에
‘井’자 모양의 손금이 남아있다. 불상의 肉髻부분에서 大德 5年(1301)에
인출된 阿彌陀三尊陀羅尼가 발견되어 제작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手印: 모든 佛菩薩과 諸天善神의 깨달음의 내용이나 활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시 가운데, 양쪽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모양.
(85) 대흥사 금동관음보살 좌상[大興寺 金銅觀音菩薩 坐像]
-보물 1547호 -麗末鮮初 -金銅 -海南 大興寺 聖寶博物館
한쪽 무릎을 세운 遊戱坐와 輪王坐 자세는 중국 宋代에 특히 盛行한
형식으로 고려시대에 受容되어 많은 작품이 남아있다.
이 보살상은 結跏趺坐 상태에서 오른쪽 다리를 세우고 왼팔에 체중을
실은 채 머리와 上體를 곧게 세우고 있다. 이 像과 유사한 상이
康津 高聲寺에서도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에 對外 海上貿易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바다와 인접한 全南 海南과 康津에 宋代 輪王座菩薩像 圖像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跏: 책상다리 할 가 *趺: 책상다리 할 부)
(86) 목조아미타불좌상[木造阿彌陀佛坐像]
–日本 헤이안(平安)시대, 12세기 -일본 국립도쿄박물관
西方淨土를 다스리는 阿彌陀如來에 대한 信仰은 中國과 高麗, 日本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日本에서는 특히 헤이안(平安)時代(794~1185) 後期
淨土宗의 확산으로 阿彌陀堂과 阿彌陀像이 빈번하게 조성되었다.
阿彌陀佛坐像은 阿彌陀佛의 아홉 가지 手印가운데 두 손을 배 앞에서 마주하여
엄지와 검지를 맞댄 上品上生印(法界定印)을 취하고 있다. 이 부처의
손 모양은 衆生의 性品이 모두 다르기에 각 단계에 맞추어 說法하여 淨土往生을
돕는 阿彌陀佛의 救濟方式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의 佛像 중에서도 비슷한 手印을 취한 아미타불이 조성되어
동북아시아가 共有한 阿彌陀 信仰과 圖像을 확인할 수 있다.
(87) 목조대일여래좌상[木造大日如來坐像]
–日本 헤이안(平安)시대, 12세기 -日本 국립도쿄박물관
日本의 헤이안(平安)時代(794~1185)는 中國에서 들어온 密敎의 영향으로
密敎의 本尊인 大日如來像을 활발하게 제작하였다. 왼손 검지를 세우고
이를 오른손으로 감싼 智拳印의 手印은 고려시대 毘盧遮那佛의 手印과
동일하다. 그러나 日本의 大日如來가 머리를 높게 묶고 身體를 莊嚴한
보살의 모습인 점은 高麗의 如來形 毘盧遮那佛과 다른 점이다.
두 佛像 모두 목재를 결합하여 불상을 彫刻하는 分割組立技法으로 제작되었다.
(88) 목조 세지보살좌상[木造 勢至菩薩坐像] -中國 金 또는 南宋
-12~13세기 -나무 -英國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두 다리를 접어 편안하게 바닥에 두고 오른손을 든 手印의 大勢至菩薩이다.
높게 묶어 올린 寶髻만큼 높은 寶冠을 착용하고 보관 중앙에 寶甁이 있다.
보살의 重量感 있는 體軀, 裝身具, 天衣 처리와 같은 전반적인 특징은
中國 山西省 平陽府 洪洞縣에서 출토되었거나, 그곳에 있는 金代 佛菩薩像과
공통점이 보인다. 觀音菩薩과 쌍을 이루어 阿彌陀三尊佛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全身에 彩色의 흔적이 있다.
(89) 목조 관음보살좌상[木造 觀音菩薩坐像] -중국 宋 -나무
-英國 영국박물관
唐나라 양식을 繼承한 南方의 宋과 北方의 遼 佛像은 11세기 이후에는
각각 독자적인 樣相을 보인다, 宋代에는 觀音菩薩은 半跏坐와 遊戱坐,
輪王坐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한 觀音菩薩像이 제작되었다.
특히 해안가에 위치한 福建省과 浙江省 지역에서는 補陀洛迦山의
水月觀音 信仰이 유행하여 遊戱坐 혹은 輪王坐를 취한 觀音菩薩像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 像처럼 巖座 위에 앉아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발을
臺座 아래로 편하게 내린 遊戱坐는 北宋代 이래 水月觀音像의 보편적인
자세로 정착되었으며, 암좌가 없는 경우에도 대개 水月觀音像으로
간주된다. (*浙: 강 이름 절)
(90) 십일면 천수관음보살좌상[金銅 十一面 千手觀音菩薩坐像]
-고려 14세기 -金銅
千手는 천 개의 손이라는 뜻으로 이 보살의 능력과 표현방법이 매우
다양함을 상징한다. 千手觀音信仰은 中國을 통해 傳해져 우리나라에서도
觀音信仰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高麗後期에는 국가적인 災難을
물리치기 위해 千手觀音을 모신 法會가 열리기도 했다.
千手觀音을 彫刻像으로 표현할 때는 이 像처럼 千手를 대표하여 40手나
42手로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손에 전부 다른 지물을 들고 있는데
모두 <大悲心陀羅尼>, <千手經> 등 千手觀音 系統 經典에서 규정하는 바와
일치한다. 보살의 머리는 원래 1개에 하단에 5개, 중단에 4개, 상단에
1개가 있다. 經典에서는 憤怒의 얼굴, 크게 웃는 얼굴이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 보살상의 얼굴은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91) 금동 천수관음보살좌상[金銅 千手觀音菩薩像] -大理國 11~12세기 -金銅
-美國 메트로폴리탄박물관
千手觀音은 ‘千手千眼觀自在菩薩’을 줄인 말로,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衆生이 겪을 수
있는 모든 災難을 없애주는 菩薩이다. 千手觀音에 대한 신앙은 中國 唐나라 때 유입되어
아시아 各國에 퍼졌다. 고려시대의 千手觀音信仰이 기록되어있으나 彫刻像으로
남아있는 것은 2점 정도밖에 없다. 이 像은 24개의 팔로 千手觀音의 형상을 표현했다.
가늘고 긴 허리와 上∙下體의 比例, 낮게 걸친 裙衣, 인동무늬(忍冬文)를 채운 寶冠의 형태로
보아 中國 雲南省 일대에 있던 大理國(937~1253)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裙: 치마 군)
(92) 금동 대세지보살좌상[金銅 大勢至菩薩坐像] -보물 1047호
-고려 14세기 -금동 -서울 관악구 호림박물관
지혜로 衆生의 어리석음을 없애준다는 大勢至菩薩로 연꽃臺座 위에
앉아 있는 작은 金銅像이다. 머리에는 꽃무늬와 갖가지 보배로 화려하게
장식된 寶冠을 쓰고 있으며 정수리에는 肉髻를 큼직하게 표현하였다.
寶冠 정면에 寶甁을 새겼는데 이는 오른손에 들려있는 經典과 함께
이 보살상이 大勢至菩薩임을 알려준다. 臺座는 연잎이 3겹으로 중첩된
연꽃대좌인데, 연잎은 테두리에 단이 진 특징적인 모습이다.
佛像의 얼굴표정, 날씬한 허리, 치마의 주름단과 허리띠, 전신의 구슬장식,
연꽃무늬 등을 종합해 보면 14세기 말~15세기 초의 보살상으로 추정된다.
-景福34 제80차 文化遺産踏査(6-3); 大高麗 918-2018, 그 찬란한 挑戰 (5-3)에 계속 -